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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문화재, 동래정씨 정난종 일가의 묘소 답사기 2022-06-29 13:29:19

관리자

경기 문화재, 동래정씨 정난종 일가의 묘소 답사기

사단법인 자연과 함께하는 사람들 감사 명인자

사)자연과 함께 하는 사람들 참자연교사회(대표 김현복)에서 실시하는 3차 역사문화기행이 있는 날이다. 4호선 대야미역에서 정난종묘를 어떻게 찾아가야할까를 걱정하고 있었다. 때마침 우리 일행의 차량이 대야미역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날아왔다. 차가 갈치저수지를 지나 오래지 않아 동래정씨 가문의 재실(齋室) 앞에 도착했다. 재실 앞 공터에는 하얀 망초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오늘의 답사지는 정난종(1433~1489)을 파조(派祖)로 하는 동래정씨 익혜공파(翼惠公派)의 묘소이다. 정난종은 조선 전기 동래부원군을 지냈고 서예에도 일가를 이룬 인물이라고 했다. 정난종이 쓴 세조와 성종의 연간 서체를 가지고 금속활자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동래정씨 일가가 이곳을 지켜온 지가 500년이 넘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정난종의 종가와 묘역이 자리 잡고 있다.

조선시대 정난종을 파조로 하여 그의 후손들이 지켜온 이 지역에서 13명의 정승이 나왔다고 한다. 정난종은 “어떤 입장에도 치우치지 말고, 부하뇌동 하지 말자.”는 가훈을 후세들에게 전했다. 동래정씨 정난종 가문이 5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권세를 누릴 수 있었던 비결은 치우치지 않고 중도적인 입장을 취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자연과 함께 하는 사람들’ 단체의 역사문화기행은 한 달에 한 번씩 열린다. 사학을 전공한 이진복 열린사회연구소 소장과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연구관을 지낸 나각순 박사가 함께 하면서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 해설을 해주신다. 역사문화는 아는 만큼 보여진다. 정난종 묘소를 향해 올라가면서 일행 중 한 명이 ‘갈치저수지’의 명칭에 대해서 물었다.

“갈치저수지에 갈치가 사는 겁니까?”
어떻게 해서 그런 명칭이 붙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갈치는 칡 갈(葛)과 언덕 치(峙)가 결합된 단어다. 한자에 능숙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약간 어리둥절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갈치라는 단어의 유래에서 본 것처럼 정난종 묘소를 찾아 올라가는 길 양편에 칡덩굴이 무성했다. 정난종 일가 묘역 앞에 다다르니 묘역 게시판이 있었다. 게시판에는 ‘경기도 기념물 제 115호’라고 적혀있었다.

이곳에는 조선 전기의 문신인 정난종과 그 후손의 무덤이다. 정난종은 세조와 성종 연간에 활동한 훈구파의 중요한 인물이며,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였다. 정난종은 서예에도 뛰어나 금속활자로 만들 때 그 바탕 글씨를 썼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차남인 정광필은 중종반정 이후에 영의정까지 올랐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었다.

묘역 안내판 앞에서 간단히 설명을 듣고 나서 동래정씨의 묘역을 둘러보기 위해 숲 풀 사이로 올라갔다. 기울기가 큰 언덕배기에 묘 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정난종 부부의 무덤이 하단에 위치하고, 장남인 정광보의 무덤이 중단에 있으며, 차남인 정광필의 무덤이 상단에 배치되어 있었다. 정난종 일가의 무덤은 일반적인 무덤 배치와는 다르게 역장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정난종 부부의 묘를 둘러보고 기울기가 큰 언덕길을 올라갔다. 위로 올라가면 갈치저수지의 전경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산으로 둘러 쌓여있고 앞에 저수지가 있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자리임을 확인해볼 수 있었다. 정난종 가문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활동했던 사람은 정광보의 둘째 아들 정사룡(鄭士龍, 1491-1570)이라는 것이었다. 후손이 잘 되어야 조상의 묘도 잘 보존될 수 있다는 결론이었다.



무덤의 배치

봉분 앞에는 신도비를 비롯하여 혼유석, 상석, 향로석, 장명등, 문인석, 무인석, 석마, 석호 등 다양한 석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밝혀주는 신도비는 2품 이상의 품계만 세울 수 있다고 한다. 장명등은 묘역에 불을 밝혀 사악한 기운을 쫓아내는 역할을 한다. 봉분 바로 앞에는 혼유석과 상석과 향로석이 있다.

상석과 봉분 사이에 놓인 혼유석(魂遊石)은 향을 피우면 망자의 혼백이 온다고 생각해서 마련한 자리이다. 향을 피움으로써 혼을 부르는 것이다. 땅에 술을 붓는 건 혼백을 위한 것이다.
상석에 음식을 놓고 제를 지내는 것은 여러 번 보아 왔지만 혼유석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었다. 조선시대에는 죽음을 혼(魂)과 백(魄)의 분리로 보았다. 혼백(魂魄)은 몸은 죽었어도 영혼은 계속 남아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죽음을 바라보는 전통적인 시각이다. 묘역에서 이루어지는 절차를 하나하나 듣고 보니 묘역 답사도 상당히 재미있었다.

정난종 일가의 묘소는 모두 부부가 쌍봉이다. 어느 쪽이 남편의 묘이고, 어느 쪽이 부인의 묘일까? 서쪽 봉분이 남자의 묘이고, 동쪽이 여자의 묘이다. 누구의 묘인지를 알려면 신도비를 읽어봐야 한다. 모두 한자로 되어있는 신도비는 조선시대의 품계와 호칭을 알지 못하면 누구의 묘인지 알지 못한다.

내명부의 호칭

조선시대에는 문관과 무관의 품계마다 호칭이 다르다. 내명부 또한 남편의 품계에 따라 호칭이 달라진다. 당상관 이상만 부인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다. 내명부의 호칭은 《경국대전》이라는 책에 정리되어 있다. 문무관 1품의 처를 군부인(郡夫人)이라 한다. 정경부인(貞敬夫人)은 문무관의 처 중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고, 만인의 존경을 받는 부인에게 내리는 지위라고 한다. 부부인(府夫人)이나 군부인(郡夫人)은 종 1품 이상의 문무관의 아내에게 붙여주는 호칭이다. 숙부인(淑夫人)은 문무관 정 3품 당상관 부인에게 붙여주는 호칭이다.

비석과 모표에 새겨져 있는 문양 하나하나에도 다 깊은 뜻이 새겨져 있었다. 이곳의 비문은 보호각 안에 보호되어 있었다. 보호각은 비와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보호각 안에 있는 비문들이 오히려 많은 마모를 가져온다고 했다. 정광보 묘갈의 비문은 이행(李荇, 1478-1534)이 짓고 성세창(成世昌, 1481-1548)이 썼으며, 정광필 신도비의 비문은 소세양(蘇世讓, 1486-1562)이 짓고 이황(李滉, 1501-1570)이 썼다. 깨알같이 박힌 이황의 글씨를 본다는 것만으로도 정난종 일가의 묘역 답사에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퇴계 이황이 쓴 글씨라지만 빼곡히 들어찬 글씨는 잘 보이지 않는다.

정난종 일가의 묘역 답사를 마치고 숙정공주(淑靜公主, 1645-1668) 묘역으로 이동했다. 숙정공주는 동래정씨 문익공파와 관련이 있다. 숙정공주의 묘는 숙달동 덕고개에 자리하고 있다.
숙종공주는 꽃다운 나이인 22살에 죽었다. 숙정공주의 남편 정재륜(鄭載崙, 1648-1723)은 효종의 부마였다. 부마(駙馬)는 임금의 사위 또는 공주의 남편을 이르는 말이다. 정재륜의 생부는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이다. 그는 좌의정 정치화(鄭致和)에게 입양되었고, 1656년에 효종의 다섯째 딸 숙정공주와 혼인하여 동평위가 되었다. 정재륜은 숙정공주가 22살에 죽고 난 후에도 부마 재혼 금지법 때문에 재혼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숙정공주와 정재륜의 묘는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 것인지 풀이 무성했다.


숙정공주 묘를 답사하고 난 후에 좌의정을 지낸 정치화의 묘를 보러갔다. 들어가는 길도 없었지만 더 놀라운 것은 봉분 위에 커다란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자식이 없어서 정재륜을 입양했지만 동평위 정재륜 또한 부마 재혼 금지법 때문에 재혼을 할 수 없는 처지였다는 것이다. 좌의정 정치화의 묘는 동평위 정재륜의 묘보다 더 방치되어 있었다. 지금은 묘를 만들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있는 무덤 위에 나무가 자라고 있는 모습은 안타깝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경기도 기념물 제115호 정난종 묘역 답사에서는 묘 주인의 역사적 사건과 함께 연계된 주변의 역사적 흐름을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정치는 최종적으로 권력과 관계를 맺는다. 권력은 힘이 강하지만 권세는 영원하지 않다. 권세는 짧고 역사는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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